들어가며

당신이 분석형 인간에 가깝다면(특히 연구직이라면...), 아마 인간 관계에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넌 왜 항상 분석만 해?"
"그냥 내 말 좀 들어줘."
"공감 좀 해주면 안 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억울했을 수도 있다. 나는 분명히 진심으로 도우려 했는데. 너를 위해 열심히 해결법을 생각했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이 글은 T가 문제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T인 사람들이 관계 안에서 자주 겪는 패턴, 그리고 그게 어디서 오는지, 무엇을 조금 바꾸면 달라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일부 항목은 T의 특성이라기 보다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발달시켜온 방어 패턴에 가까운 부분도 있다. 오늘 글에서는 그 구분들도 함께 이야기하려 한다.

아래 글에서 '나' 는 분석형 인간을 의미한다. 

 


1. 나는 공감능력이 없는게 아니라, 공감보다 분석이 먼저 켜지는 사람이다

상대가 힘들다고 말하면, 자동으로 이 순서가 작동한다.

왜 힘들지? → 원인은? → 해결책은?

연구나 일에서 이 방식은 강점이다. 하지만 관계 안에서, 특히 누군가가 감정적으로 힘들 때, 그 사람이 원하는 건 해결책이 아닐 때가 많다. 그 사람은 그냥 이 말 한마디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많이 힘들었겠다."

공감이 없는 게 아니다. 순서가 다른 것이다.

실천
상대가 힘든 이야기를 꺼낼 때, 첫 문장은 반드시 공감으로 시작한다. 조언과 질문은 그 다음이다.

지금 습관: 질문 → 분석 → 해결 → (공감)
바꿀 순서: 감정 → 공감 → 질문 → 해결


2. 나는 사람의 말을 정보로만 듣고 있었다

T인 사람들은 상대가 전달하는 사실은 잘 듣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충격적인 사실은, 많은 인간관계에서는 정보보다 감정을 파악하는게 훨씬 중요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 겉으로 드러나는 정보를 인지하는데 초점을 둘게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그 사람의 감정을 인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부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요즘 너무 바쁘다."
→ 사실: 바쁨
→ 감정: 힘들다, 지쳤다, 외롭다, 관심받고 싶다

말 뒤에 숨은 감정을 놓치면, 상대는 "내 마음을 모르는구나"라고 느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감정 신호를 비교적 자연스럽게 읽어낸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 이해받는 느낌을 주곤 한다. 그리고 그런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할 때 인간은 즐겁다고 느낀다. 분석형 인간도 이 능력을 배울 수 있으며, 실제로 배우기 시작하면 관계가 훨씬 편안해지는 경우가 많다.

실천
상대의 말을 들을 때, 정보를 파악하기 보다 먼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다.

"이 사람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뭘까?"

 


3. 가벼운 말을 토론 주제로 만들지 않기

T인 사람들은 상대가 가볍게 던진 말도 논리적으로 받아치거나 반박하고 싶어진다. 본능적으로 "그건 좀 다르게 보면~"이 나온다.

하지만 모든 말이 토론 주제는 아니다. 상대는 그냥 공감받고 싶었을 뿐인데, 매번 논리 게임이 시작되면 관계가 피곤해진다.

실천
가볍게 던진 말은 가볍게 받는다. 혹 무겁게 던진 말이거나, 꼭 반박이 필요한 말이라면, 반박을 하기 전에 "그랬구나" 혹은 "네 말도 이해돼"를 먼저 넣는다. 이후 반박 의견을 말한다. 관계는 논문 심사가 아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상대가 한 말을 약속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다. 가볍게 던진 말을 무겁게 기억하고, 지켜지지 않으면 무관심으로 해석하게 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건 약속이 아니라 그 순간의 의도 표현일 수 있다. 중요한 약속은 명확하게 확인하되, 모든 말을 약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4. 나는 생각보다 따뜻한 사람일 수 있다.

T라는 이유로, 또는 분석적이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차가운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차가운 게 아니라,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머리로 살아온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T인 사람들은 종종 "나는 관계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인가?"라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인 경우가 많다. 문제가 생겼을 때 대화하려 하고,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이건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관계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관계를 지키는 방식이 분석 중심이었던 것뿐이다. 그 따뜻한 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을 뿐.

실천
따뜻함을 새로 만들 필요는 없다. 마음속에서 이미 느끼는 걱정과 애정을, 조금 더 빨리 말로 꺼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표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모른다. 


5. 취약함을 보여주는 것이 약함이 아니다

우리는 불안, 실패, 두려움을 잘 숨기는 경향이 있다. 완벽하게 보여야 한다는 압박, 드러내지 않아도 스스로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혹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가치가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완벽함보다 진솔함에 끌린다. 취약함을 보여주는 것은 관계를 약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깊게 만든다.

실천
신뢰하는 사람에게 조금씩 공개해 본다. 걱정되는 것, 실패한 경험, 불안한 마음. 한 번에 다 말할 필요는 없다. 5%씩만 꺼내도 충분하다.


6. 서운함을 장난으로 포장하지 않기

서운할 때 직접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상대는 이게 진짜인지, 장난인지 알 수 없다. 결국 감정은 전달되지 않고, 오해만 쌓인다.

실천
서운할 때 장난 대신 직접 말한다.

"사실 조금 서운했어."

이 한 문장이 오해를 절반은 줄여주며, 상대방이 당신을 성숙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7. 확인 질문 대신 먼저 표현하기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지 확인받고 싶어서, 이런 식으로 묻게 된다.

"나 보고 싶었어?"

하지만 이 방식은 상대에게 부담을 주고, 확인을 받지 못했을 때 더 불안해지는 악순환이 된다.

실천

❌ 나 보고 싶었어?
⭕ 나는 보고 싶었어.

먼저 표현하는 것이 더 용기 있는 일이고, 관계를 더 따뜻하게 만든다.


8. 정확한 말보다 힘이 되는 말

T인 사람들은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선의로 한 말이 상대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안 될 수도 있어."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상대에게 필요한 건 통계적 정확도가 아니라 힘이 되는 말이다.

실천

❌ 안 될 수도 있어.
⭕ 쉽지 않겠지만, 나는 네가 잘 해낼 수 있다고 믿어.

정확한 말과 힘을 주는 말은 다르다. 둘 다 배울 수 있다.


9. 존재 자존감 — 행동과 존재를 분리하기

성과 지향적인 사람들은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이런 생각으로 직행하기 쉽다.

"나는 문제 있는 사람인가?"

하지만 실수는 사건이지, 내가 아니다.

연애가 잘 안 됐다 ≠ 나의 가치
발표를 망쳤다 ≠ 나의 가치
공감을 못 했다 ≠ 나의 가치

사람은 항목별 합산 점수로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다. 무언가를 잃어도 내 존재 전체가 무너지는 건 아니다.

실천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이지?"가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났지?"를 먼저 묻는다.

나란 존재는 무슨 일이 있든 존중받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믿어간다. 


10. 논리적 설득이 감정이 되돌리지는 않는다  

 T인 사람들은 갈등이 생기거나 관계가 틀어졌을때,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고 보듬어주기 보다는,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상황을 파악하며 상대를 논리적으로 설득시키려 한다. 그러나 갈등을 해결하는 첫 단계는 상대의 감정을 보살피는 것이다. 상황 분석과 문제 해결은 그 다음에 와도 늦지 않다.

그러나 분석형 사람들은 상대가 나를 이해해야만 내가 괜찮아지는 구조가 되어 있을 수 있다. 이해받지 못하면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설득을 멈추지 못한다.

실천
감정은 논리적 설득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상대 감정의 수용과 이해, 공감이 먼저 기반이 되어야 한다. 또한 상대가 이해하면 좋고, 이해하지 못해도 나는 괜찮을 수 있어야 한다.


마치며

정답을 찾기 전에, 감정을 먼저 만나자.

분석이 먼저 켜지는 사람이라고 해서, 관계 안에서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하고 싶어서 긴장하고, 너무 소중해서 분석하고, 너무 잃기 싫어서 설득한다. 그 마음은 진짜다.

다만 필요한 것은 그 마음이 상대에게 닿는 방식을 조금 바꾸는 것이다.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먼저 감정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먼저 감정을 바라보고,
정답을 찾기보다 먼저 사람을 만나는 것.

이 글에서 이야기한 변화들은 결국 그 연습에 관한 이야기였다.

완벽하게 바뀔 필요는 없다. 단지 조금 더 공감하고, 조금 더 표현하고, 조금 더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관계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당신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상대도 마찬가지다.

서론 

당신은 언제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는가.

좋은 성과를 냈을 때일까. 누군가에게 인정받았을 때일까. 원하던 결과를 얻었을 때일까. 혹은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줄 때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완전히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질문을 바꿔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만약 오랫동안 공들인 일이 완전히 실패로 끝난다면?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상대가 나를 떠난다면? 나보다 훨씬 못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보다 앞서 나간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자리에 닿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도 여전히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최근 며칠간 이 질문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에는 전혀 다른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나는 잘할 수 있다"는 믿음, '능력 자존감'. 다른 하나는 "잘하지 못해도 나는 괜찮다"는 감각, '존재 자존감'.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것인데, 우리 대부분은 앞의 것만 키우며 살아간다. 성취하고, 인정받고, 증명하는 방식으로. 그래서 성과가 흔들리면 자신이 흔들리고, 관계가 끝나면 자신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처럼 느낀다.

이것이 존재 자존감이 중요한 이유다.

존재 자존감이 없으면, 우리는 평생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야 한다. 일이 잘 되어야 괜찮고, 누군가 나를 좋아해야 괜찮고, 선택받아야 괜찮다. 그 조건이 사라지는 순간, 자신도 함께 무너진다. 이 패턴은 연애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커리어에서, 인간관계에서, 삶의 모든 국면에서 반복된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 자체를 바꾼다.

자신을 증명해야만 가치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실패 앞에서 무너지고, 비판 앞에서 방어적이 되고, 사랑받는 순간에도 불안하다. 그 사랑이 언제든 조건과 함께 사라질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반면 존재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실패해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비판을 받아도 무너지지 않고 배울 수 있다. 사랑받는 순간에도 그것이 자신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조금 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이 둘의 차이를 몰랐으나, 최근 아주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나는 왜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 내가 잘하지 못해도, 실패해도, 누군가를 실망시켜도,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

 

이것은 내가 나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내가 나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증명하기 위해 살아온 시간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달려왔다. 잘하면 인정받고, 인정받으면 가치가 생기고, 가치가 있는 사람은 사랑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잘하려고 했다. 더 노력하려고 했다. 더 부족함 없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문제는 그 방식으로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목표를 이루어도 다음 목표가 생기고, 어떤 인정을 받아도 언젠가는 다시 불안해진다. 그래서 나는 늘 증명해야 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실망한다면? 그 순간 나는 사랑받을 자격을 잃어버리는 걸까?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유능한 것과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은 처음부터 다른 문제였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왔다. 하지만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성과는 나를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존재의 허가증은 아니다.

그동안 내가 필사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 처음부터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와는 상관이 없다.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까

이 사실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로 느껴진다.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성과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실패했다고 해서 존재 자체가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실망을 주었다고 해서 사랑받을 자격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쉽게 따라오지 않았다. 왜 그럴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평가받는다. 좋은 성적을 받으면 칭찬받고, 잘하면 인정받고, 성과를 내면 보상받는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세계관이 만들어진다. '가치는 획득하는 것이다.', 인정은 조건부다. 사랑도 노력의 결과다.

그래서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는 말은 오히려 낯설게 들린다. 너무 오랫동안 반대 방향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존재 자존감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너무 단순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이유를 찾는다.

왜 가치 있는가. 왜 사랑받을 수 있는가.

하지만 존재 자존감은 그 질문 자체를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존재는 설명될 수는 있어도, 정당화될 필요는 없다고.

그래서 이 말은 처음 들으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낯섦 자체가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조건부 가치 체계 안에서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갓난아기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사랑받는다. 병든 사람도 사랑받을 수 있고,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다. 우리는 원래 성과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점점 그 순서를 거꾸로 배우게 된다.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범죄심리학이 말하는 것 — 행위와 존재는 다르다

이 생각을 습득하는 데 의외의 영역에서 도움을 받았다. 바로 범죄심리학이다.

범죄학자 섀드 마루나(Shadd Maruna)는 저서 Making Good(2001)에서 흥미로운 연구를 소개한다. 그는 오랜 기간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삶을 바꾸는 데 성공하고 어떤 이들은 그러지 못하는지를 연구했다.

그가 발견한 핵심 차이는 범죄자의 기술이나 환경이 아니라, 자기 서사(self-narrative), 즉 자신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였다.

범죄를 멈추지 못한 사람들은 이른바 '단죄 서사(condemnation script)'를 갖고 있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어차피 달라질 수 없어." 즉, 자신의 행위와 존재를 동일시한 것이다. 나쁜 짓을 했으니 나는 나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니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논리. 이 믿음 속에서 변화는 불가능하다.

반면 삶을 바꾸는 데 성공한 사람들은 '구원 서사(redemption script)'를 구성할 수 있었다. "내가 끔찍한 일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달라질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단순한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정면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잘못이 자신이라는 존재 전체를 규정하도록 두지 않는 것이다.

범죄심리학의 맥락에서 이 구분은 재활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변수다. 그리고 이 통찰은 비단 극단적인 상황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내가 실패한 것과, 내가 실패한 사람인 것은 같은가.

그렇지 않다. 

 


존재 자존감이 면죄부는 아니다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는 말이, 무슨 짓을 해도 나는 행동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존재 자존감은 행동과 존재를 분리하는 능력이다.

내가 잘못했다면, 그 행동은 분명히 돌아봐야 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면, 책임져야 하고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고쳐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존재 전체가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내가 실수했다"와 "나는 실수투성이인 인간이다"는 다른 말이다. "내가 누군가를 서운하게 했다"와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다른 말이다.

오히려, 존재 자존감이 탄탄할 때 진짜 책임이 가능해진다. 존재가 흔들리지 않으니, 잘못을 방어하거나 합리화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존재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 전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오히려 더 방어적이 된다.

존재 자존감은 책임 회피의 도구가 아니라, 온전한 책임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다.

 


"너는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말의 의미

흥미롭게도 비슷한 통찰은 종교에서도 발견된다.

나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이 깨달음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떤 경험과도 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잘해서 얻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사랑에 가깝다고 한다. 

평생 잘해야 사랑받는다고 믿어온 사람에게, "너는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관의 전복이다. 삶 전체를 지배해온 전제 — 나는 증명해야 한다, 실패하면 버려진다 — 가 한순간에 흔들리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범죄심리학이 발견한 것도, 기독교가 오래전부터 말해온 것도, 그리고 내가 이번에 겨우 닿은 것도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다.

행위와 존재는 다르다. 그리고 존재는 증명 없이도 이미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성장은 자기부정 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수용 위에서도 가능하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자격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가치 있는 내가 더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일 때, 성장은 강박이 아니라 건강한 선택이 된다.

 


나는 이제 다른 바탕 위에서 살고 싶다

나는 사랑받고 싶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나를 다정하게 바라봐주는 사람 곁에 있고 싶다. 이 마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사람은 원래 사랑받고 싶어하며 그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다.

사랑은 완벽한 사람과 깊어지는 게 아니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알면서도 곁에 남을 때 깊어진다. 취약함은 가치 하락이 아니라, 진짜 관계가 시작되는 입구다. 그리고 이것은 연애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에서, 우정에서, 무엇보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이룬 것보다 크고, 내가 실패한 것보다 크고, 나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보다 크다.

나는 잘해야만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실패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부족해도 존중받을 수 있다.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사실을 조금씩 믿어보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최근 2-3년 정도는 많이 쓸쓸했던 것 같다.
혼자인게 너무 외롭고 쓸쓸해서 일부러 기숙사 2인실에 들어가 룸메이트랑도 생활을 해봤는데,
룸메이트가 바빠서(마찬가지로 대학원생) 아침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고, 주말엔 따로 나가고.. 해서
점점 친해지긴 친해져도 완전히 마음을 놓고 친해지는건 어려웠던 것 같다.   
아무 연고도 없던 대전, 사람도, 놀거리도 서울경기권에 비해 많지 않은 대전.
여기서 마음 둘 곳 없이 혼자 이리저리 휘청이던 나
너무 심연 속으로 들어가게되고 마음이 힘들어서
마지막(가장최근) 에는 수업도 하나 드랍하고, 남은 하나의 수업은 출석도 시험공부도 아예 안했다. 할 수가 없는 심리상태였다.
마음에 여유 없이 스트레스만 가득하니까 부모님이랑도 쉽게 다투고. 친구랑도 사이 멀어지고.
연구도 제대로 깊이 빠져서는 못하고, 간신히 미팅, 코웤, 국가과제, 내가 해야할 일들만 꾸역꾸역 쳐내는 정도.
뭘 하나 도전해보려고 해도 도저히 노력이 들여지지가 않았다. 
내 2025년은 그랬다.
...
2025년도에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고양이 한 마리를 분양받은 것이다. 
어쩌면 2025년 내가 아니라, 인생 통틀어 가장 잘한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루아(고양이)랑 함께 지내게 된 후로는 슬픈 일에는 울어도, 지독한 외로움을 이유로는 더 이상 집에서 혼자 울지 않게 됐다
나에겐 이것 하나만으로도 너무 축복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사실,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싶다. 그 무엇보다도 값진.
나와 감정 교류를 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진 생명체이면서, 그 아이의 태어남과 죽음까지 전 생애를 지켜보고 함께하며, 
집에서 나와 함께 하는 것 외에 다른 삶이 없고, 거짓말하거나 배신할 일이 없다(큰 스트레스를 받을일이 전무).
외모나 성격, 성별도 내 취향에 맞게 내가 직접 이 세상에서 함께하길 선택한 개체이며, 교육을 통한 변화가 비교적 쉽게 가능하다. 
이건 설령 직계가족이라고 해도 갖추지 못하는 특성이다.
부모의 경우,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원하는 만큼의 감정 교류를 하기 더 힘든 경우가 있고,
나를 만나기 전 보내온 시간이 있으며(그 과정에서 개인 스스로 학습한 것들이 있으므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수있음)
개인의 삶이 있기 때문에(그자체로도 별로지만) 가능성은 낮아도 어떤 부모는 거짓말하거나 배신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내가 선택한 개체가 아니라, 강제 랜덤 부여된 사람들이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웬만해선 교육을 통한 변화가 안된다.
자식의 경우, 마찬가지로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감정교류가 힘들 수 있고, 
개인의 삶이 있기 때문에 크면서 거짓말하거나 배신할 수 있으며 부모에게 큰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어릴때는 뭣 모르니까 몰라도, 특히 성인이 된 이후로는 장담할 수 없다)
내가 선택한 개체가 아니라 강제 부여된 개체이며 성향/성질이 온화할지 나와 잘맞을지 등을 알 수 없다
교육이 되긴 하겠지만 성향에 따라 번거롭고 까다롭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려동물이 가지는 이점이 너무 너무 크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 그 아이 삶의 가장 큰 부분인데
이걸 대체해서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인간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간의 사랑? 우정? 그게 무슨 소용이지?
어짜피 그런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 것에 진심이란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더라도 진심을 다 내어주지 않는 경우도 많고,
진심을 내어줬다하더라도 가치관과 행동거지가 이상할 수 있고, 
어떤 경우든 시간이 흐르면 결국 타인에게/다른 상황에 혹한다.
인간이란 그런 생물이니까. 병신같이
스스로의 기준이 확고한 / 도덕적으로 무결함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해도
이 시대에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려울 뿐더러
세상이 점차 변화시키고, 또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을 탓할 순 없다. 
반면 반려동물의 사랑은 맹목적이다. 그게 느껴진다.
 
인간한텐 기대를 하면 안된다.
사랑과 진심에 대한 기대는 삶의 비중을 많이 차지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런 큰 것에 기대를 하게 되면 곧 실망하게 되고(어짜피 이루어질수없다),
곧 삶이 무너진다. 
사랑은 반려동물이랑 하는 것. 
나는 그만큼 우리 루아를 사랑한다
간혹 반려동물 카페를 보면, 해외를 가게 돼서, 이사를 가게됐는데 집주인이 키우질 못하게 해서, 개인사정으로 등등
가족같이 키운 소중한 아가인데 어쩔 수 없이 잘 보살펴줄 분을 찾는다는 글이 보인다.
그럴 때마다 어이가 없다.
니가 낳은 아이였어도 그렇게 버릴거야?
그 아이는 평생을 너만 바라보면서 너만 사랑했고 네가 가족인데..
고작 그런 이유로 버려
해외 안가면 되잖아. 아님 데려가면 되잖아. 가족을 못 데리고 가는데 어쩔 수 없잖아. 
이사 안가면 되잖아. 아님 집주인이 키우게 하는 곳으로 가던가. 가족을 못 데리고 가는데 어쩔 수 없잖아. 
그래놓고 뭐가 가족같이 소중하단거지? 정말 가족이라면 어떻게 버려?
그런 사람들은 분명히 언젠가 본인 가족들도 버릴 것이다. 병신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진정한 가족을 버릴 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정말 너무 화가난다.. 진심을 주지 못하는걸 넘어서 진심을 준 동물까지 버리는 사람들이 정말 한심하고 실망스럽다
 
아무튼 혼자 죽을만큼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 혼자 종종 집에서 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겐 상담이고 뭐고 다른 것 보다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걸 추천한다.(물론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금전/환경적 여건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
단, 애교 완전 많고 사람 좋아하는 개냥이나 완전 예쁘고 애교많은 강아지로.
볼때마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힐링이 되고 품에 끼고 있게 된다. 
집에서 나갈 수가 없어...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다는걸 저도 아는지 하는 짓도 너무 너무 예쁘다.. 
진짜 어떻게 이런 고양이가 있나 싶을 정도로..
한 가지 걱정은 루아가 나보다 먼저 죽었을 때다.
그떄쯤이면 나도 마음의 준비가 됐을테니 괜찮을까.
 
우리 루아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나랑 함께 있어주면 좋겠다. 

르느와르의 고양이



그리고.. 아래는 인터넷 보다가 발견한 글. 첨부해두고간다


 
 
  
  

 

인간은 원래 3-40년 정도짜리의 시야를 가진 존재다.

인류 역사 대부분에서 평균 수명이 3-40대였으니, 인간의 뇌는 원래 '장기적 성찰'에 최적화되어있지 않다.

과거에는 이 한계를 외부 장치가 보완했다. 가령, 가문, 공동체 규범, 선대의 이야기, 반복되는 의례, 종교 같은 것들이 있었다. 

여러 인간들의 인생 이야기와 경험들이 쌓여 만들어지던 것들. 무지한 후대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오는 삶의 지식인 것이다.

그래서 개인이 짧게 살아도, 스스로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이미 정리된 기준 위에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그 장치들이 거의 사라졌다. 

전통보다 개인선택이 중요하게 되었고, 규범보다는 취향, 기준보다는 트렌드, 기억보다는 알고리즘.

인간의 뇌는 여전히 3-40년짜리 사고 구조인데, 기댈 수 있는 외부 기준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생기는게 오늘날의 몽매함이다.

요즘 사람들은 인간의 기본 한계를 가려주는 구조 없이 살아가고,

경제/문화의 발달으로 인해 자유가 증가함에 따라, 남는 시간들을 쾌락/유행/집단 평균을 좇는데 쓴다.

바쁘면 바쁜대로, 놀면 노는대로 생각없이 살아가니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없다.  

정리하면, 인간은 짧게 살고, 과거에는 그 한계를 사회가 보완해주었지만. 

지금은 각자가 스스로의 기준을 세워야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그러는 사람이, 올바른 기준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그 기준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으니 그저 살아가고. 그렇게 살아가다 자식을 낳은 사람들은 또 그렇게 교육하질 못한다.  

기준 없는 몽매한 사람들은 늘어나고, 기준 있는 사람은 흔들리거나 외로워진다. 

 

요즘 사람들의 관계와 태도를 보면 종종 혼란스럽다. 

여러 사람을 동시에 만나고. 약속은 가볍게 깨지고. 책임은 쉽게 회피되고. 

행실이 바르지 않고. 유흥을 즐기고.

언행에서 도덕과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으며 사람간의 신의를 모르는 천박한 

지조 없이 쾌락과 자극만 찾는 동물 같은 사람들..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치관은 망가져 있고, 인터넷 및 커뮤니티 등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점점 더 망가져간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명심해야 한다. 주위에 보이는 것들에 휘둘리고 현혹되면 안된다고.   

다수의 사람들이, 내 주위 사람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일반적이거나 옳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다수의 행동이 아니라 스스로의 (올바른)가치관에 근거한 판단이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미래의 배우자와 자식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가.  

坚定信念,坚守志节

견정신념 , 견수지절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신념을 가져야 하고, 그 신념 위에서 삶의 방향과 행실의 기준을 지켜야 한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모르고, 또 지키지 못하는 태도가 당연해진 세상 사람들이

솔직히 실망스럽다. 

 

 

 

 

 

 

 

예로부터 집안의 혈통은 남자가 이어왔다.

나는 그 이유가, 우리나라는 부계사회였기 때문에. 가문을 법적/사회적으로 대표하는 존재가 남성이었기 때문에.. 라고 생각했다. 문화사회적인 이유인 것이라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생물학적으로도 집안의 혈통은 남자가 잇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다.  

여자가 XX, 남자가 XY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 또 물려받으니 

사실 X 유전자는 후손으로 갈수록 가문 외 다른 유전자와 필연적으로 뒤섞이게 되는데(따라서 X 유전자만 있는 여자는 그 집안의 내력을 확실히 이었다고 보장할 수 없다)

Y 유전자만은 뒤섞일 일 없이 무조건 그 전 선대남성의 Y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 선대는 또 선대의 남성으로부터, 또 선대의 남성으로부터.. 이렇게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따라서 해당 가문의 Y 유전자는 돌연변이가 생기지 않는 이상, 완전 초대, 시조부터 내려온 Y와 동일하며 그 가문의 모든 남성은 동일한 Y 유전자를 공유한다. 집안의 혈통인 것이다.

* 여기서 나는 혈통을 '시조부터 단절없이 동일성을 유지하며 이어진 단일 계통'이라 정의했으나 이게 유일한 혈통의 정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이러한 과학적 지식이 없던 과거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걸까? 경험의 빅데이터를 토대로?

신기하다. 

 


올 한해를 돌아보니
살며 들은 적도 거의 없었던 중국어 노래들에 빠져있던 것 같다.
중국은 발라드도 좋고(멜로디라인이나 가사가 매우 감성적) 사극 풍의 노래도 잘 만든다.
감성적인 느낌과 중국의 언어가 잘 어울리는 느낌을 받는다.
하루종일 듣다가 종종 혼자 노래방가서 부르기도 할 정도..
미국과 중국이 현 공학계의 최전선을 이끄는 두 나라이긴 하지만
그동안은 당연히 미국으로 포닥갈 생각만 했는데
지금의 세계 정세나 내가 더 관심이 가는 문화들을 고려하면
이젠 오히려 중국으로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마음을 완전히 정한건 아니고.. 선택지에 올라갔다 정도
우리 전 세대에선 일반적인 경로는 아니었으니 더더욱
미래에 많은 고민을 하고 최종 선택해야겠지
어짜피 학계에선 다들 영어 쓰긴 할테지만
만약 가게되면 그곳에서 생활을 해야하니 중국어를 배워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매력적인 언어라고 생각해
특히 사극에 나오는 여성분들의 목소리와 말투가 너무 예뻐서
나도 그렇게 따라 말하고 싶어진다
물론 그분들도 일상에선 그렇게 안하겠지만
확실히 나라에 호감을 갖게 하는데에는 콘텐츠의 힘이 큰 것 같다.

최근에 한 성세천하 OST 중 망심 이라는 곡이 있는데
가사도 멜로디도, 얽혀있는 스토리도 너무 좋아서
내 블로그에 적어두고 싶었다.
나는 가사를 읽으며 노래를 듣는게 좋더라.
감정이 북받쳐오르는 그 느낌이 좋다.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https://open.spotify.com/track/6aubg3D8jGnwKQbaLV8Zta?si=3MYqQD-aRW-ihweExzQPzQ

 

妄心 - 互动影视 《盛世天下》章节情感曲

小时姑娘 · 妄心 (互动影视 《盛世天下》章节情感曲) · Song · 2025

open.spotify.com


https://youtu.be/oT3HaTNO338?si=iPyvsEJJKZ4jlKEY

 


太咫尺的目光
너무도 지척인 눈길
타이 즈츠 더 무광
太遥远的相望
너무도 아득히 먼 서로의 마주 봄
타이 야오위안 더 샹왕
檐角下 风铃孤影轻轻晃
처마 끝 아래, 풍경의 외로운 그림자가 살며시 흔들리고
옌자오 샤, 펑링 구잉 칭칭 황
惊散了 水月一场
물과 달의 한바탕 꿈을 놀라 흩뜨려 놓는다
징 산 러, 수이 위에 이창

有心如佛 宝相严庄
마음은 불과 같아, 보배로운 모습은 엄숙하고 장엄하나
요우 신 루 포, 바오 샹 옌좡
输她眸中 红尘万丈
그녀 눈동자 속의 만 길 속세에는 미치지 못하고
수 타 머우 중, 훙천 완장
止水若生微澜 总滔天如浪
고요한 물에 미세한 물결이 일면, 끝내 하늘을 뒤덮는 파도처럼 되어
즈수이 러오 셩 웨이란, 종 타오톈 루 랑
吞没日月天光
해와 달과 하늘의 빛을 삼켜 버린다
툰모 르위에 톈광

问神佛 情字何伤
신과 부처에게 묻는다, ‘정(情)’이라는 글자는 무엇이 그리 상처인가
원 선포, 칭 쯔 허 샹
要人间 不许成双
인간 세상은, 둘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가
야오 런지엔, 부 쉬 청 솽
留一痕于心口 触不到的愿想
가슴에 한 줄 흔적만 남기고, 닿을 수 없는 바람은
류 이 헌 위 신커우, 추 부 다오 더 위엔샹
化腕上一轮 春光
손목 위 한 줄기 봄빛으로 변해 간다
화 완 샹 이 룬, 춘광

问我心 所向何方
내 마음에 묻는다,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원 워 신, 수오 샹 허팡
朝谁的背影痴望
누구의 뒷모습을 향해 어리석게 바라보는가
차오 쉐이 더 베이잉 츠왕
纵一瞬即永远 不可及的妄想
한순간이 곧 영원이라 해도, 닿을 수 없는 망상
종 이 순 지 융위안, 부 커 지 더 왕샹
唯腕上一轮 心光
오직 손목 위의 한 줄기, 마음의 빛만이
웨이 완 샹 이 룬, 신광

有心如佛 宝相严庄
마음은 불과 같아, 보배로운 모습은 엄숙하고 장엄하나
요우 신 루 포, 바오 샹 옌좡
输她眸中 红尘万丈
그녀 눈동자 속의 만 길 속세에는 미치지 못하고
수 타 머우 중, 훙천 완장
止水若生微澜 总滔天如浪
고요한 물에 미세한 물결이 일면, 끝내 하늘을 뒤덮는 파도처럼 되어
즈수이 러오 셩 웨이란, 종 타오톈 루 랑
吞没日月天光
해와 달과 하늘의 빛을 삼켜 버린다
툰모 르위에 톈광

问神佛 情字何伤
신과 부처에게 묻는다, ‘정(情)’이라는 글자는 무엇이 그리 상처인가
원 선포, 칭 쯔 허 샹
要人间 不许成双
인간 세상은, 둘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가
야오 런지엔, 부 쉬 청 솽
留一痕于心口 触不到的愿想
가슴에 한 줄 흔적만 남기고, 닿을 수 없는 바람은
류 이 헌 위 신커우, 추 부 다오 더 위엔샹
化腕上一轮 春光
손목 위 한 줄기 봄빛으로 변해 간다
화 완 샹 이 룬, 춘광

问我心 所向何方
내 마음에 묻는다,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원 워 신, 수오 샹 허팡
朝谁的背影痴望
누구의 뒷모습을 향해 어리석게 바라보는가
차오 쉐이 더 베이잉 츠왕
纵一瞬即永远 不可及的妄想
한순간이 곧 영원이라 해도, 닿을 수 없는 망상
종 이 순 지 융위안, 부 커 지 더 왕샹
唯腕上一轮 心光
오직 손목 위의 한 줄기, 마음의 빛만이
웨이 완 샹 이 룬, 신광

纵桑田与沧海 纵烈焰与刀光
뽕밭이 바다로 변하고, 바다가 다시 바뀌어도 불길과 칼날의 섬광이 이어져도
종 상톈 위 창하이, 종 례옌 위 다오광
仍不曾枯萎 心光
여전히 시들지 않은, 마음의 빛
렁 부 츠엉 쿠웨이, 신광
你仍是我的 心光
너는 여전히 나의 마음의 빛이다
니 렁 스 워 더, 신광

스토리 섞여있는 영상 (메인주인공 아니고, 서브캐릭터들의 사랑이야기)
https://www.youtube.com/watch?si=AWaBZxfJjsLsxf6A%EF%BB%BF&v=ZdjQWDuv1HQ&feature=youtu.be

 


올해가 끝나간다.

2025년은 참 스펙타클 했던 것 같다. 도전도 많이 하고. 실패도 많이 하고. 때론 성공도 하고.

금년에 배운 가장 큰 교훈은, 태도를 결정하기 전에 사람을 오래 지켜보아야 하며, 사람에 따라 내 마음가짐을 다르게 갖고 응해야 한다는 것.

그 외로는..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며, 초반에는 대개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늘 숙지해야 한다는 것.

솔직함과 터놓고 말하는 것이 어떤 상황/사람에게는 악수이며, 오히려 의도적으로라도 침묵하는것이 더 강력한 수단이 되는 것.

상대방이 원하지 않을 수준의 과한 염려와 애정은 선의에서 나왔더라도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키니 절제하는 것이 좋다는 것.

등등,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동안 내 마음만 중요했지, 타인의 마음에 큰 관심이 없었어서 그런가, 나는 유독 인간관계에 약한데 

아무래도 지금이 그런 것들을 배워가는 시기인 것 같다.

이제 이기적인 내 모습들을 조금씩 내려놓고 타인의 마음을 먼저 배려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같다.

궁극적으로 그게 나한테 더 좋을 것 같아서.. 이니까 결국 내 생각 하는거긴 한데 아무튼.

2026의 목표는 그것으로 삼아야겠다.

그리고 다이어트도. 

 

다이어트 하니까 말인데,

최근에 너무너무 재미있게 본/한 중국 드라마 게임이 있다.

성세천하:여제의 탄생... 

장르는 시네마틱 인터랙티브 (중국)궁중 어드벤처 게임으로, 

간단히 말하면 미연시처럼 내 선택지에 따라 스토리가 다르게 진행되는 게임인데,

실제 배우가 연기를 한다. 

이런 류의 게임은 처음 해보는데 (애초에 게임을 잘 안하기도 하고..) 너무 재미있게 봤다.

혼자 하는것보다도 스트리머가 하는거 같이 보는게 더 재미있는듯?  

중요한 건, 여기 나오는 배우들이 정말 너무너무 너무 이쁘고 잘생겼다.

처음엔 진짜 ai 로 만들었거나 게임 그래픽인줄 알았다. 다들 너무 이뻐서.

성세천하 여주인공

 

찡그려도 이쁘다
성세천하 남주인공 중 한명.

스토리도 OST도 BGM도 연기력도 연출도 다 너무 잘 만든 게임이라 추천한다.. 

스토리는 중국의 여제, 측천무후 의 실제 역사들을 기반으로 재미있게 각색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여주인공이 너무 내 취향으로 예뻐서 

나도 20대의 한 순간 쯤 저런 느낌으로 예뻐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드니까

식었던 다이어트 열의가 다시 생겼다.

찾아보니까 키가 167, 몸무게가 43kg 이시더라... 그럼 키빼몸 124kg 인데.. 말이 안되는데

그럼 나는 41이 되어야 하는데... ㅎㅎ.. 게다가 지금 한창 살이 올라서 인생 역대급 몸무게인데.. 

...! 일단은 도전해보기로 했다. 한 43kg 까지는 어찌저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만 29살 되기 전까지 한다고 치면 대략 2년반? 남았다. 만 29살 후 20대의 1년 정도는 그 여주인공같은 느낌으로 지내야지.

너무 추워서 밖에 못나가겠으니 집 안에서 링피트랑 홈트 하면서 빼야겠다. +식단

좀 따뜻해지면 헬스장이나 필라테스 다니고.

2026년은 행복하고 밝고 활기차게 살아야지.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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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알게 모르게 가장 귀중한 것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정의하는 인간은 '감정을 즐기는 동물'이다.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들은 결국 감정을 느끼는데 의의를 둔다. 

유투브, 넷플릭스 등 컨텐츠들을 보는 것도. 내가 그 활동을 하진 않지만 그 활동을 하는 타인/캐릭터들을 보면서 대신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니 보게되고.

연애, 결혼, 출산. 의식주. 취미생활. 술 담배. 온갖 활동들 모두 그것들을 통해 감정을 느끼려 하는 것이다. 

감정은 단순한 emotion을 넘어 뇌로 전달되는 전기자극, 그리고 그 전기자극을 통해 뿜어내지는 기분을 좋게, 중독되게, 혹은 기분을 나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내포한다. 

모든건 감정을 느끼고자 하는 것들이니, 더 높은 단계의/더 진한 감정/더 다양한 감정을 느끼려 노력하는 것이 어떻게보면 삶의 목표가 될 수 있겠다.

나는 인간으로써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느껴보고 싶다. 특히 그 감정이 진하고 깊을수록 재미있고 가치있을 것 같다. (단, 물론 올바른 가치관과 신념하에서.)

그런 면에서, 좋은 방향의 감정들도 좋지만, 슬픈 쪽의 다양한 감정도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명체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다방면으로 즐겨보는데도 의의가 있으니.

 

벌써 26년간 세상 구경을 했네

70년 정도는 더 세상을 구경해보고 싶다. 느낄 수 있는 어떤 감정들이 있을지 궁금하고, 또 세상이, 그리고 나라는 사람이 세월이 흐르며 어떻게 바뀌어 갈 지도 궁금하고. 

그래. 구경하는 재미로 살아가봐야겠다.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지만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수만큼 각기 다른 세상들이 존재한다

내가 사는 세상의 시간의 흐름. 어떤 것들을 내 세상에 들여둘것이며 어떤 경험과 감정들로 채울 것인지는 

순전히 내가 결정한다.

그래서 인생을 살며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을 갖고 그것을 관철하는데에 있다.

남들의 생각, 시선, 일반적인 사회적 관념들. 그로부터 스스로에게 스며드는 불안감과 조급함.

그런 것들을 내 세상에 들여놓으면 안 된다.

그저 내가 하고싶은것을. 내가 되고싶은 모습으로. 내 신념을 지키며. 내 시간의 흐름대로 내 인생을 사는 것이 값지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모른다 하더라도 나만은 나를 안다.

나만은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렇기에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야한다. 

신념을 잃은 사람은 나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매력적이지 않으니

나를 내가 지켜본다는건 결국, 세상에 나를 알아주고 믿어주는, 사랑하는 사람이 반드시 한 명은 있는 것.

그러니 든든한 마음으로 살아가자

그러다보면 점점 더 나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으며

나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자는 언젠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애쓴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 기적의 근거를 차곡차곡 쌓는 중이다."  

 

 

 

 

  

 

 

요즘 너무너무 춥다

너무 추워서 밖을 못 나가겠다.. 

내 몸은 기본적으로 찬 성질에다 수족 냉증도 꽤 심하게 있어서

어릴때는 내 맨 발에 닿으면 앗 차가워! 하고 얼음에 닿은 것 같다며 놀라던 사람도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한기가 올라오는게 스스로에게 느껴질 정도    

겨울이 되면 정말.. 누구보다 롱패딩 빨리 꺼내입고 목도리 하고 다니는데

그래도 ㄴㅓ무 너무 춥다. .

그래서 내 꿈이 새로 추가됐다

- 겨울이 없는, 사계절이 모두 온화하고 따뜻한 나라에서 사는 것.. 

내가 태어난 곳에 구애받지 않고 떠나, 좋아하는 날씨와 환경을 가진 곳을 스스로 선택해 생활한다는 건 

생명체로서 하고 싶은,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 참에 나는 생명체로서 또 어떤 걸 하고 싶을까 생각해봤는데, 

먼저 아까 말했던 

- 겨울이 없는, 사계절이 모두 온화하고 따뜻한 나라에서 사는 것

- 현 인류의 언어 중 가장 많은 인간들(인종)이 쓰는 언어를 원어민만큼 유창하게 하는 것 (가능하면 3개국어 하는게 좋으니 궁극적으로 언젠가 한국어/영어/중국어 정도는 하고 싶다) 

- 현 국가들 중 가장 번영한 나라에 가서 2년 이상 살다 오는 것

- 하고 싶은 일에서 저명한 사람이 되는 것

- 위대한 일을 하여 인류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 

- 즐거운 취미 같은 활동을 하나 만들어서 인생 전반에 걸쳐 몰입하는 것 

- (?) 언젠가 사랑하는 가정을 이루는 것 

 

이정도의 7가지 인 것 같다. 

그 중 6가지는 나 스스로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것들인데, 

마지막, 가정을 이루는 건.. 스스로의 노력으론 안되는 과업이라 생각한다

과연 이 세상에 평생을 함께 지내고 싶을만큼 내 마음에 드는, 함께 있는게 더 행복한, 서로의 진심을 나눌 수 있으며 진정 가족이라 생각하는, 그 존재로 스트레스 받지 않는.. 그런 사람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나에겐 앞의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인 것 같다고 느껴진다.

지금 당장은 이걸 포기하고 혼자 잘 살아가는데, 나머지 6개를 이루는데 집중하려 한다.

또  사실 굳이 인간 남자와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고양이랑 살면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기도 하다 

생명체로서 내 아이를 못 본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지만,

그러고 싶은 상대방이 없다면 굳이..

차라리 혼자 지내는게 행복할 것 같다. 

 

꼭 겨울이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내 인생에서도 적어도 타인에 의한 겨울은 안 생겼으면 좋겠다. 

너무 춥고 차가운데 내가 노력한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속수무책 에너지를 다 뺐길 수 밖에 없고 더 뭔가를 할 기력이 생기질 않는다

요즘 그렇게 흐물흐물 살고 있다 

마음도 춥고 몸도 춥고.. 난 추운게 너무 싫은데. 

여름은 너무 멀었으니 얼른 봄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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