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델피 아폴론 신전의 한 기둥에는 이런 말이 써있었습니다.

네 자신을 알라

이 문장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죠. 바로 유명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입니다. 세간에는 이 문장이 소크라테스가 만든 격언이라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아폴론 신전의 기둥에 쓰여져 있던 문구가 그 유래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이 문구를 해석하길, “자기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알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하였지요. 저도 그 의미에 공감합니다만, 델피 신전에 문구를 적은 원작자의 의도는 조금 달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힘써라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신 아래 무지하며 무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신을 숭배하고 경배하라는 의미에서 그 문구를 써넣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래도, 신전의 한 기둥에 써져있었으니 말입니다.

 

<오이디푸스 왕> 에도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내용의 후반부에서, 요카스터가 오이디푸스에게 하는 말인데요,

“God keep you from the knowledge of who you are”

신이시여, 오이디푸스 그가 그의 정체성을 모르게 해주세요, 라는 의미입니다. 요카스터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오이디푸스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 전대 테베의 왕 라이오스의 살인자이며, 어머니(요카스터 자신)와 근친상간을 한 비극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입니다. 오이디푸스는 그럼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서죠. 요카스터가 한 말, 그가 그의 정체성을 모르게 해달라는 말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너 자신을 모르게 하라가 될 수 있겠습니다. 이 말, 언뜻 너 자신을 알라와 비슷해 보이지 않나요? 표면적으로는, ‘모르게 하라알라는 반대되는 말이라 생각될 수 있지만, 신전에 적힌 의미에서의 너 자신을 알라의 말과는 그 의미가 비슷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신전에서 신께 경배하라. 인간인 네 주제를 알라. 더 이상 신의 영역을 넘보지 말라의 의미와, 요카스터가 말한 진실을 모른 채 살아라. 네 자신이 누군지 알려 하지 말고, 그저 편하게 살아라의 의미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두 문장은 정반대의 의미를 갖고있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네 자신을 알라의 의미라면 말이죠.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의 무지를 알라고 하였지만, 그건 무지함에 안주하며 살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기위해 노력하라고 말하죠. 소크라테스에게 무지란 더 뛰어난 를 위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 왕 또한 더 뛰어난 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카스터는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고, 거짓된 세상 속에 안주하며 살아가길 권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그를 거부하며 불편한 진실을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딛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이 장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죠. 그는 작품 속에서 늘 불편한 진실 앞에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을 찾아 나섭니다. 제 정체성을 찾아 나섭니다. 그는 그러한 인간이었기에, 스핑크스가 묻는 네 정체성이 무엇이냐, 너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었고, 그는 그러한 인간이었기에, 인간들의 영웅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인간이었기에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작품은 진정한 비극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오이디푸스와, 그의 정체성에 대한 얘기를 더 안할 수 없죠. <오이디푸스 왕>은 나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서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대답을 했습니다. 이는 오이디푸스가 평소에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신이 나아갈 길에 대해 꾸준히 고민해왔다는 것을 내포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찾아왔음에도, 스스로 왕의 자리를 버리고, 두 눈을 찌르고.. 인생 전체를 희생해가며 진실을 찾겠다 한 것이겠죠. 그런데, 슬슬 이러한 의문이 듭니다. 내가 내 아빠의 살해자이며, 그로 인해 내 나라에서 왕위를 놓고 쫓겨나야 하며, 근친상간까지 저질렀다는 끔찍한 진실이 있다. 그리고 이 끔찍한 진실을 피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렇다면 이 진실을 알기 전에, 인정하기 전에 회피하고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 요카스터의 제안대로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래요, 분명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왜 저렇게 자신의 정체성에 집착하지? 그냥 넘어가면 편할 것을. 매번 왜 이렇게 고집부리는거야!’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하는 독자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진실을 회피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게, 진정한 내 인생을 살아가는 걸까요?

 

이 의문에 대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명작, 영화 트루먼쇼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은,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에 24시간, 매일 출근하는 남자입니다. 24시간, 매일 출근한다는 의미는 사생활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모릅니다. 자신의 삶이 24시간 남들에게 공개되어 있다는 것을요. 그는 그를 위해 준비된 마을 모양의 세트장에서, Tv에 출연한다는 사실을 아는 연기자들(그가 아는 모든 지인들이죠)에 둘러쌓여,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그는 마을에서 행복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데다, 그가 주인공인걸요! 삶의 어느순간, 그는 불편한 진실에 대한 낌새를 눈치채고, 진실을 파헤쳐 갑니다. 그리고 영화의 막바지에 치달아, 진실을 마주한 그가 세트장을 탈출하며 영화는 끝이 나게 되지요. 이 상황, 어딘가 오이디푸스의 얘기와 닮아있지 않나요? 여러분이 트루먼쇼의 주인공이라면 어떻습니까?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나만을 위한 세트장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까? 아니면, 앞으로 어떤 인생이 날 기다릴지는 모르지만, 진실을 마주하고 짜여진 세트장, 날 가두는 새장 속에서 탈출할 것입니까? 오이디푸스는 탈출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오이디푸스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두렵고 힘들더라도. 진실을 마주하고, 내 삶 안에 만져지는 나라는 존재를 느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행복이며,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고귀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저 편안한 삶을 추구하며 양심에 가책이 있어도 나의 이익만을 좇는 사람이 많아졌지요. 저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오이디푸스 왕>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많은사람들에게 나 자신에 대해,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해, 내가 걸어갈 길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줄 것입니다. 오이디푸스 왕의 삶은 비참했지만, 분명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누구나 회피하고 싫어할 것을 제대로 바라보며, 진실로 달려갈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삶. 마지막까지도 신을 포함한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은 자신이 결정하는 삶. 현명하고 현명한 오이디푸스. 저는 오이디푸스를 영웅이라 생각합니다.

 

2021. 07

김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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