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에세이 : 번식
당신은 번식하고 싶은가?
몇십억 년 전, 자연스레 지구라는 세상에 태어난 생명체는 이상하게도 삶의 영속을 원했다. 특히 지능이 가장 뛰어났던 인간은 불멸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했다. 영혼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신체가 죽어도 정신은 살아 사후세계에 간다고도 말하고, 불사의 몸을 얻기 위해 사방팔방 찾아다닌 자도 있으며, 영생불사를 믿고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보관하기도 했다. 불멸을 향한 이런 무의미한 일들 가운데 사실 가장 근접하게 도달한 방법이 ‘번식’이었다. 자신의 유전자를 대대손손 전달할 수 있는 번식을 통해 나름의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생명체는 짧은 생에 만족하지 않고 자연스레 번식해갔다. 심지어는 번식을 위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형질을 발달시키기까지도 했다.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 사슴의 커다란 뿔과 같이 스스로를 포식자들의 눈에 더 잘 띄게 하지만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게 하는 요소들 말이다. 진화론에선 이런 현상들을 근거로 들며 자연은 ‘개체’의 생존보다 종의 ‘번식’을 우선시한다고 말했다. 세상은 ‘나’보다 내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것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우리는 번식이 당연하고 중요한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그저 유전자전달의 매개체로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개체로서의 ‘나’는 굳이 왜 살아가는 걸까? 지구상의 생명체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렇게 번식만을 위해, 번식에 번식을 거듭하며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의문을 가진 나로서는 인류가 왜 불멸을 원하는지, 또 개체로서는 오래 살아있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린 아무 의미 없이 유전자를 물려주고 있다. 언젠가 인간 또한 공룡처럼 멸종할 순간이 올 테고, 수십억 년 후에 또 다른 생명체가 등장할 것이다. 곧 그 생명체도 번식을 거듭하다 멸종할 것은 당연하다. 결론적으로 그 반복은 전혀 쓸모가 없다. 멸종을 하던 안 하던 상관없이 어쨌거나 필요 없는 생태계의 연결고리이다.
플라톤의 ‘에로스의 기원과 성질’에서 사랑의 기능은 아름다움 안에서의 생식과 출산이고, 그것은 생물체 안에 들어있는 불사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랑을 통한 생식이야말로 죽어야 할 존재의 삶을 영원히 살게 하며 불멸의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모든 생명체가 사랑을 보이는 것은 불멸성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불멸을 성취하기 위해 사랑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궤변이다. 사랑을 통한 번식을 한다고 해서 절대 불멸을 얻을 수 없다. 나는 나일 뿐이다. 하물며 순간 이동장치(신체의 모든 생체정보를 나노 단위로 쪼개 복사한 후 다른 위치에 그 정보 그대로 다시 조합해 맞추는 것)도 이동한 개체를 정말 이동 전의 ‘나’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는데, 출산을 한다 해서 낳은 것을 과연 ‘나’의 영속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쉽지만 죽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없어진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사랑을 불멸성을 얻기 위한 도구로 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욕심이지만 번식을 위한 자연의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엔 동의한다. 사랑은 짝짓기 행위를 위한 심리적 속임수이다. 그러나 그것이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삶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랑 없는 삶은 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속임수임을 알면서도 속아줄 수밖에 없다. 사실 이미 자연적으로 그런 본성을 갖고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이 사랑할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나는 번식을 거부할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 존재하니까. 다만 사랑은 할 것이다.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해서가 아닌 온전한 ‘나’의 행복을 위해서. 앞서 말했듯이 사랑은 무의미한 삶에 그나마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이나 번식의 목적이 불멸이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영원할 수 없고 영원히 산다고 한들 의미가 없다. 그저 하나의 개체로서 사랑받고 예쁨받아 행복하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영원하지는 못하더라도 짧은 이 순간을 나의 행복으로 가득 채운, 나를 가장 우선시하는 삶을 누리고 싶다. 사실 앞서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둥 의미가 없다는 둥 삶에 회의적인 입장을 표한건 맞지만, 그렇다 해서 굳이 살고 싶지 않다며 낙심하거나 극단적인 생각으로 다다르면 안 된다. 인류가 종교를 만들고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믿은 것처럼, 스스로를 속여야 한다. 우리는 태어나 축복받았고, 가정을 꾸려 오순도순 살다 죽으면 충분히 행복한 거라고. 세상에 이미 태어나버린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살다 가야만 하니까 말이다.
2019. 10
김다예